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클라라 슈만 (문단 편집) ==== 후기 작품 ==== 하지만 '클라라 슈만'이 된 후에는 이런 기교주의적인 성향을 버리고 좀더 구성과 표현력을 중시하게 되는데, 이는 당연히 남편의 영향에 의한 것이다. 결혼하기 2년전에 작곡된 d단조 스케르초(op. 10)에서 이미 슈만의 영향이 많이 나타나고 있으며 결혼 이듬해에 작곡된 c단조 스케르초(op. 14)에서는 좀더 명확하게 슈만 풍의 스타일이 드러나고 있다. 남편이 쓰러지기 1년전인 1853년에 작곡한 슈만 주제에 의한 변주곡(op. 20)을 위의 벨리니 변주곡과 비교해서 들어 보면 음악성향의 변화를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이러한 표현주의적 성향은 그의 거의 마지막 작품인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3개의 로망스(Op. 22)에서 정점을 찍는다. 클라라 슈만은 이 작품을 당대의 비르투오소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요아힘에게 헌정했는데, 이 둘이 같이 떠난 연주여행에서 하노버의 왕 [[게오르크 5세]]가 이 곡에 대해 "극도로 황홀하다"라고 격찬한 일화는 유명하다. || [youtube(yJFcJOFwtE4,start=5,width=440, height=240)] || ||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3개의 로망스(op.22) || || [youtube(kNV9SoztdG4, width=440, height=240)] || || 로베르트 슈만 주제에 의한 변주곡(op.20) || 당연하겠지만 슈만 부부는 음악적으로 정말 밀접했다. 단적인 예로 위에 인용된 슈만 변주곡의 제 6변주에 사용된 부점 리듬 등에서는 남편의 영향이 그대로 느껴진다. 또 1845년에는 클라라가 대위법을 활용한 작품(3개의 전주곡과 푸가 op. 15)을 썼는데, 똑같은 시기에 남편도 오르간을 위한 6개의 푸가(op. 60)[* 엄밀히 말하면 오르간이 아니라 페달 피아노를 위한 작품이다. 다만 오늘날 페달피아노가 거의 사용되지 않기 때문에 주로 오르간으로 연주한다.]나 피아노를 위한 4개의 푸가(op. 72)와 같은 대위법을 이용한 작품을 남겼으며 같은 사람이 썼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작곡 스타일도 매우 유사하다. 분명 함께 대위법을 공부하고 함께 작품을 썼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이처럼 클라라 슈만의 작품은 훌륭한 작곡가였던 남편의 영향이 많이 나타나지만 남편의 아바타에 머물렀던 것은 아니고 나름 자신만의 음악적 특징도 가지고 있는데, 스스로 뛰어난 피아니스트였기 때문인지 음악적 표현에 치중했던 남편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피아니즘이 두드러진다.[* 물론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당대의 다른 기교파 피아니스트들보다는 표현주의적 성향이 짙다.] 클라라는 남편이 사망한 후에도 40년을 더 살았으며 브람스같은 대작곡가들과 지속적으로 친교를 맺었기 때문에 계속 작곡을 했다면 남편과 확실히 구별되는 자신의 음악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남편이 쓰러진 후 작곡을 중단해 버렸으니 아쉬울 따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